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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낮은 언덕들 (배수아)

비오는날비맞기 2013. 12. 25.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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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한국인이다. 그러나 그는 독일에 체류하며 가끔 한국을 오간다. 최근에는 독일어 작품을 번역하며 여러권의 번역서도 내놓는다. 작가는 신들린듯 글을 써내려갈 것이다. 작가는 자신을 마취시킨듯 긴 호흡의 문장들을 써내려갈 것이다. 나는 배수아의 역대 최고의 작품으로 바로 이 작품, '서울의 낮은 언덕들'을 꼽을 것이다.

 

서울의 낮은 언덕들. 배수아. 2011년 작품. 자음과모음 출판.

 

 

그런가 하면 다음과 같은 주장도 등장합니다. 사실은, 현세에 허용된 유효기간은 이미 모두 지나가버렸고, 지금 우리가 삶이라고 느끼면서 경험한다고 믿는 내용들은, 단지 완전히 사라져간 이 세상의 마지막 단계가 빛 속에 희미하게 남겨놓은 허구의 잔영이 깜박거리면서 반사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입니다. 오직 시차 때문에 시각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사실상 거대한 어머니인 허공을 이루는 별의 죽음에 불과한 그것.

 

 아, 이건 내 말이 아닙니다. 틀뢴, 이것은 보르헤스의 개념이죠. 그리고 제발트는 그의 책 [토성의 고리]에서 이개념을 아주 멋지게 시적으로 해석해놓았어요. 나는 그들의 문장을 재구성해서 인용한 것에 불과합니다. 당신의 말을 들으면서 내 눈앞에는 시간으로 이루어진 도시들이 떠올랐답니다. 바로 당신이 눈으로 보았을 법한 그런 도시들 말이죠. 비행기에서 내려 입국 수속을 마치고 버스 정류장 안내판 앞에 서 있는 당신의 눈앞에서 흰 석회암 달처럼 지평선 위로 솟아오르는, 최초의 도시 우르. 눈에 들어오는 모든 풍경이 오직 불타는 테라코타 빛인 에블라. 심연의 왕 길가메시의 도시 우루크, 오렌지색 모래 계단과 현무암 장식으로 이루어진 폐허와 낮은 언덕들의 도시, 검은 얼굴의 사형수들의 목이 산을 이루는 도시, 얼룩진 달의 도시, 원시적 피라미드 도는 무덤들의 도시. 혹은 그것과 동시에 존재하면서 지금 우리가 육체적으로 걷고 있는 이 도시, 멀리서 등대처럼 빛나며 밤의 한가운데를 비추는 '스타벅스'를 발견한 여행자들이 그것을 행해, 최초와 최후의 도시들 사이에 놓인 엄청난 엷음에 스스로 현기증을 느끼며 흐릿한 초록빛과 회색빛 물의 여인을 향해 저절로 발걸음을 옮기듯이, 그렇게 당신이 지나왔고 앞으로도 지나게 될 도시들을 상상했지요.

 

 

 

 

 작가의 글

 

 영화 [아귀레, 신의 분노]로 알려진 베르너 헤르초크감독은 1978년에 책 [얼음의 길]을 발표했다. 그는 1974년 11월에서 12월 사이 걸어서 뮌헨에서 파리로 갔다. 자신의 인생에서 중요한 한 사람이 파리에서 병을 앓고 있으며, 아마도 곧 죽게 될 것이란 소식을 접하고 나서이다. 그는 순전히 스스로의 발로 걸어서 그 사람에게 가 닿음으로써 죽음에 저항 해보려고 한 것이다. 그 여정을 기록한 것이 바로 그 책이다. 나는 언젠가 걸어서 국경을 넘고 싶다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 이야기가 마음 깊이 와 닿았다. 나는 '걸어서 간다'는 행위의 진지함을 이직도 믿고 있는 순진한 사람에 속한다. 그러나 그것의 비현실성까지 모를 정도는 아니다. 이 글의 주인공 또한 비슷한 이유로 집을 나오지만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에 포기하고 만다. 하지만 그 것이 사실상 주인공의 긴 여행의 출발이 되었다. 내 시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나의 작업실들이다. 나는 이미 그들을 만나기도 했고, 아직 모르고 있기도 하다. 나는 그들을 사랑한다. 그리고 어느 날 나와 함께 서울의 낮은 언덕들을 거닐게 되었을 주인공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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